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과 운명

한울성명학으로 본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과 운명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과 운명

빈센트 반 고흐는 이름과 운명이라는 관련성에서 무관할까? 나의 견해는 이름과 운명은 결코 빈센트 반 고흐와 무관하지 않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과 운명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아래처럼 울림성명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래 짧은 분석을 보세요.

빈세트 반 고흐의 출생[계축생] 사망[경인년]

1853년 03월 30일~1890년 07월 29일(네덜란드)만 47세

1890년 1유년운 48 28 8 37 5 0
계축생 17 73 7 28 0 5
빈 센 트 반 고 흐
73 93 3 84 6 1
2유년운 04 84 4 93 1 6

이름과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을 살펴본다.

고흐는 목사님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고 0561의 기운으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랐다.

강한 7의 기운으로 예민하고 고집스러움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품과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곤했다.

73, 84의 중복된 기운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막힘이 많고 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39의 중복됨이 많아 항상 의식주의 빈곤에 시달렸다. 형제의 우애는 매우 좋았지만 7의 형제극이 심하여 불행이 형제에게 가중되고 형제에게 피해를 주며 의지를 하는 생활을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의 자살이 동생의 불행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경인년 사망의 해에는 177의 사고수가 있는 기운의 이름으로 4의 염세적인 특성이 기승을 부리며 8의 억제를 심하게 받는 해였다.

화재나 폭팔등 재난을 조심해야 하는 해에 권총자살로 생을 불행하게 마쳤다고 봅니다.

오늘날 가장 비싼 작품의 하나로 여겨지는 고흐의 작품이 그의 불행한 생에는 경제적인 빈곤을 풀어 주지를 못한 예술가의 인생이었습니다.

고흐가 극도의 가난으로 영양실조의 고통, 혼자만의 열정으로 작품을 미친듯이 하면서 조울증의 증상을 보일때 그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일부분의 성격내용이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반복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곳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기를 간단히 살펴본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인상파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풍을 확립하였다.

작품에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등이 있으며 10년간의 작품활동중 900여점의 작품과 1100여점의 습작이 있다.

생전에는 1890년 1월 브뤼셀에서 전시회를 했으나 한 작품도 팔지를 못했다.

1903년 사후 유작전에 71점을 전시후 명성이 올라갔다.

[출생]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6남매중 장남으로 그의 아버지(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목사였다.

그의 어머니(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는 1857년에 그의 동생을 낳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 테오도루스라고 이름 지었다..

[성장기]

1864년 빈센트는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빈센트는 숙부가 운영하는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하여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청년기]

당시 빈센트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1873년부터는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도 브뤼셀 지점 구필화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1873년 3월 빈센트는 헤이그를 떠나 구필화랑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영국에 머물렀으며 1875년부터는 파리지점에서 일하였다.

가게에서 영업활동을 할때는 손님과 그림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다툼이 많았으며 빈센트는 런던에서 부터 신비주의에 빠져 화랑일을 소홀히하였다.

빈센트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하였다.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였던 빈센트는 파리를 떠나 영국 램스케이트로 건너갔다.

그는 매일 성경을 탐독하고 설교 활동을 하였으며 복음 전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빈센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였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6개월간 평신도로서 전도활동만을 허가하였다.

빈센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며 전도활동에 전념 하였다. 하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 교회로 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1880년 실의에 빠진 빈센트는 그동안 계속 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센트는 미술공부를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드로잉에 관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빈센트는 라파르트라는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 배웠다.

이후 빈센트의 외사촌이자 헤이그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빈센트는 그동안 열광했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사인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상처를 입곤했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그에게 그림을 지도하던 안톤 모베와도 절교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크리스틴이라는 매춘부 출신의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콜 중독에 매독 환자였다.

빈센트의 가족은 그가 크리스틴과 지내는 것을 우려하였고 동생 테오는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하였다.

빈센트는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였지만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되었다.

빈센트는 이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받게 되었다.

[장년기]

마침내 빈센트는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빈센트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장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빈센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 후 빈센트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후세의 평가]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품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습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습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에게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이상으로 두 위대한 화가의 평생명운과 사망시기의 유년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름이 인생의 100%는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부모, 같은 유전자의 쌍둥이도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종종 봅니다. 좋은 이름은 인생의 항로에 도움이 된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외국인의 두화가의 한글울림으로 좋은 이름운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나쁜 이름운을 가진 고흐의 두분들의 이름운을 예를 들어봤습니다.

– 경북·구미 본원 김근아원장님 학술회발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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